보석처럼 예쁜 이름 '진주', 그곳에 가면 정말 이름처럼 어여쁜 밀이 자란다. 이 토종 밀은 1945년경 미국의 노먼 볼로그라는 농학자에 의해 ‘소노라 64호’라는 품종으로 개량되어 밀 수확량을 60%까지 증가시켜 동남아시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농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유전학적으로도 우수한 생명력을 지닌 이 씨앗은 1미터 이상 자라는 보통의 밀보다 작은 70~80센티미터 정도의 어른 앉은키만한 키 작은 우리나라 토종밀인 ‘앉은뱅이밀‘이다. 앉은뱅이밀은 붉은색을 띠고 찰기가 있으며 병충해에 강한 토종 밀인데, 바로 경상남도 진주가 우리 밀 중 130ha에서 연간 120톤의 밀을 생산하는 앉은뱅이밀의 최대 주산지이다.

 

필자의 유년시절 잠시 경상도의 한 마을에서 살았을 때, 그 고장의 동무들과 온 산천을 헤매고 뛰놀던 때 밀밭의 밀을 한 줌 훔쳐다가 우적우적 씹어 껌이라며 만들어 먹던 추억을 곰곰 되짚어 보면 그때 그 밀이 찰기가 많은 앉은뱅이밀이었지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앉은뱅이밀이 진주 금곡면 두문리에서 작목반까지 결성되어 재배되고 있었고, 이것이 토종 앉은뱅이밀인 것을 확인한 안완식 박사가 슬로푸드 ‘맛의 방주’에 등재를 신청하여 2013년에 등재되었다.

 

▲경남 진주 금곡면에 있는 금곡정미소

경남 진주 금곡면에는 금곡정미소가 있는데 이곳은 3대째 앉은뱅이밀을 재배해서 제분하고 있다. 백관실 금곡정미소 대표는 할아버지의 강한 권유로 앉은뱅이밀을 농사짓고 제분소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5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자면 100여 년이 된 역사 깊은 제분소이다.

지금은 22농가와 함께 영농조합을 만들어 앉은뱅이밀을 재배한다. 조합원이 아닌 농가까지 더하면 앉은뱅이밀을 재배하는 농가는 진주에만 50여 농가나 되며 인근 고성·하동·거제에서도 농사를 지어 도정하러 오는 농가들이 있다

 

앉은뱅이밀은 맛도 뛰어날뿐더러 글루텐 함량이 적어 소화가 약한 사람들에게도 좋다. 다만 부풀어 오르는 힘이 약해 빵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종이라 전통음식에 잘 맞는다. 대표적인 것이 누룩으로, 껍질은 붉지만 속살은 다른 밀보다 희기 때문에 누룩을 만들었을 때 색깔이 잘 나오고, 특유의 향이 좋다. 전통방식의 고추장에도 앉은뱅이밀을 넣으면 고소한 맛이 난다. 

 

▲수확 후의 앉은뱅이밀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인 박목월은 그 서정을 ‘나그네’라는 시에 담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술 익는 마을인지 어찌 알았을까. 바로 발효하는 누룩, 술의 향내 덕이다. 필자가 이곳저곳의 양조장들을 다니며 맛보았던 술의 깊은 풍미에는 분명 누룩의 힘이 70%는 차지한다고 본다. 술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좋은 쌀, 물, 누룩이 필요하고 그 누룩을 만드는 데에는 쌀, 녹두, 밀가루 등을 재료로 쓸 수 있는데 그중 밀가루가 누룩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밀을 누룩에 맞게 제분하고 온도를 맞추어 정성 들여 띄우면 술 빚기 좋은 곰팡이들이 생겨나 풍미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

 

진주 계동의 진주곡자공업연구소의 이진형 대표 역시 3대째 이어 누룩을 만든다. 

(고문헌에서 누룩은 ‘곡자‘ 또는 ‘국자‘로 칭해졌고 오늘날 누룩을 만드는 공장의 이름이 “ **곡자“ 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표는 “앉은뱅이밀로 만든 누룩은 향이 그윽하고 질이 우수하다”며 “그 누룩을 넣어 만든 술은 일품”이라고 말한다.

 

밀재배, 제분, 누룩 제조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명맥을 이어오니 이제 곧 100년 명가들이 속속 탄생할 듯하다.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필자는 더 열심히 먹고, 술 빚고 마셔야겠다. 길고도 깊은 겨울밤 뜨끈한 우리밀 수제비 한 그릇에 앉은뱅이밀 누룩으로 만든 석탄주 한잔을 반주로 곁들이며 이태백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흉내내본다.